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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북미 가톨릭 30년2021-12-31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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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미 가톨릭 30년 

서부 워싱턴, 3명의 대주교 거쳐 52만 신자

정의와 평등의 구현, 인간 존엄성 등이60년대 말과 70년대를 거치며, 두드러진 사회적 가치로 자리 잡아감에 따라 소수 민족들이 그들의 권익을 찾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가톨릭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평신도들이 교회 의사 결정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 같은 사회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사목위원회 및 재무 관리 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평신도 기구가 교회 리더쉽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75년 시애틀 대교구의 가톨릭 신자 수는 35만명 정도.  당시 워싱턴주 전체 인구 342만명의 10%가 조금 넘는 숫자이다.  1999년에는 약 51만 6천명으로 전체 인구 448만 명의 12%에 이른다.  신자수에서는 많은 증가가 이뤄졌지만, 교구를 비롯한   선교회등의 공동체 숫자는 1970년에 166개 였던 것이 1999년에 174개로 제자리 걸음이다.

1975년 부터 25년간 시애틀 대교구를 이끈 대주교는 3명.  1975년 2월에 임명돼 1991년 8월 80회 생일을 맞아 은퇴한 레이몬드 헌트하우센 대주교.  1987년 5월 대주교보 (coadjutor archbishop)로 임명돼 1991년 8월 헌트하우센 대 주교를 계승해 1997년 6월 세상을 떠난 토마스 머피 대 주교.  1997년 10월 임명돼 현재까지 시애틀 대교구의 수장으로 봉직하고 있는 알렉산더 브루넷 대 주교이다.

대주교와 함께 교구를 관장하는 보좌 주교로는 1976년 부터 1983년 까지 니콜라스 월시, 도널드 월 보좌 주교는 1986년 1월 부터 1988년 2월 까지.  죠지 토마스 보좌 주교가 1999년 11월에 임명돼 브루넷 대주교를 돕고 있다.

헌트하우센 대주교는 평신도들의 교회 리더쉽 참여를 적극 후원한 성직자였다.  소수 민족과 장애자들을 위한 교구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청소년들의 성소 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인 CHANNEL은 전국적인 모델이 되기도 했다.  교구청은 수 많은 평신도 단체 결성을 고무하여, 교육자 협의회, 흑인 협회, 구르실료 운동, 서북미 성령쇄신 협의회등이 활발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헌트하우센 대주교는 세계 평화를 위한 핵 반대에 강력한 입장을 보였다.  1982년 그가 항의의 의미로 소득세의 반을 납부치 않는다고 선언하자 국세청에서 그의 봉급에서 세액을 강제 징수하기도 했다.

머피 대주교는 성직 확대를 위해 많은 힘을 썼다.  이는 시애틀 교구내 신학교 숫자가 1990년 13개 였던 것이 현재 30개에 이르는 증가를 보인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 유산 반대등 사회적 이슈에 천주교의 목소리를 크게 전한 주교이다.  안락사와 유산을 촉진하는 주민 발의안이 제출됐을 때는 그의 강력한 반대 발언이 이 지방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머피 대주교는 끊임 없이 각 교구와 학교 단체를 방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항간에서는 대주교 때문에 I-5 도로에 깊은 홈이 패였다는 농담도 나왔다.   신자들을 사로 잡는 그의 연설 능력 또한 유명하다.

천주교 자선 봉사는 1975년 이래 꾸준히 확장돼 왔다.  워싱턴 빈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부 워싱턴 가톨릭 공동체 서비스 (CCSWW) 는 1979년 연 예산 4백만불, 고용 인원 200명이었으나 , 현재는 일년 예산 6천만불에 직원수 3000명에 이르러 워싱턴주 최대의 비영리 단체가 되었다.

브루넷 대주교는 국제 기독교 초교파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1999년 교황청은 성공회 – 로만 가톨릭 협의회 의장으로 브루넷 주교를 임명했다.

지난 4반세기 우리 한인 공동체의 성장을 비롯, 기타 동양인 공동체와 히스패닉 가톨릭들의 증가에 견주어 시애틀 교구청은 다민족 교회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각 공동체에 대한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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