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성당 25년의 ‘배후’ 차미도 초대 신부아름다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 "미도"성 정하상 바오로 본당의 역사를 말하면서 첫 7년 동안 한인 공동체의 주춧돌을 놓고 석가래를 세운 차 미도 신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미래의 예측은 반드시 과거의 경험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성전 건축과 함께 제2의 도약기를 맞아 새 출발을 다짐하는 우리 성당의 앞날이, 애초 25년 전 공동체가 태동할 때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초창기 7년 짧지 않은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던 차 미도 신부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1976년 우리와 처음 인연을 맺은 차 미도 (미국명 Richard Parle) 신부는 25년이 지난 아직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올림피아 공소가 위치한 예수 성심 성당 (Sacred Heart of Jesus)의 주임 신부를 맡아 올림피아 공소 신자들과 지근에서 교류하고 있다. 메모리얼 위크엔드 토요일 화창한 아침, 필자는 25년 전 처음 시작하는 한인 공동체를 7년이나 맡아 사목을 하신 미국 신부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하는,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올림피아로 향했다. 그러나 예수 성심 성당 사제관에서 너무나 평범한, 아주 흔하디 흔한 (?) 얼굴의 보통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기대와 함께 했던 긴장감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상대방을 평안하게 해주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차신부는1931년 5월 20일 생,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에서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56년 12월 20일 매사추세츠 밀튼 소재 콜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년 남짓 후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57년 11월 1일 신프랜시스코 항을 출발 12월 2일 인천항에 도착함으로써 40년이 넘는 한인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서울 돈암동 콜롬반회 본부에서 6개월 간 어학 연수를 마친 후, 강원도 철원에서 1년간 보좌 신부 생활을 거쳐 1959년 9월 강원도 와서리 금화면에서 5년간 사목활동을 펼치게 된다. 6.25의 격전지였던 금화면에서 그가 펼친 전교 활동을 보면 한인들과의 인연이 왜 40년 넘게 끈질기게 이어져 올 수 밖에 없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교회는 물론 천주교 신자라고는 전무했던 금화에 성당을 짓고, 집 집마다 방문하며 통하지도 않는 말로 주님을 전하러 다니는 한국 깡촌의 노랑 머리 미국 사람을 상상해 보면 차 신부의 하느님 사랑, 인간 사랑을 그려 볼 수 있다. 그렇게 집 집을 찾아 다니는 전교를 통해 1년 후에는 124명이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로 다시 태어난다. 그가 금화를 떠날 때까지 5년의 사목 기간중 영세를 받은 500명이라는 숫자가 그의 전교에 대한 정성과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을 웅변해 준다. 1961년 어느 날엔가는 8살된 여자 꼬마 아이(사진중 차 신부 오른쪽 옆에 서있는 소녀 버나데뜨)가 스스로 찾아 와서 영세를 요청하고, 얼마후 부모 형제(차 신부 뒤쪽 가브리엘을 안고 있는 아버지 박 안드레아씨, 그 앞이 아들 라파엘)가 모두 같이 영세를 받게 된다. 30년 후 1991년 차 신부가 환갑을 맞아 금화를 다시 방문했을 때 반가운 재회를 했다. 버나데뜨의 어머니 모니카(사진 중 차신부 오른쪽 뒤) 에게서 “지난 주에 전화가 왔었다.”며 차 신부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회갑을 잊지 않고 문안을 드린 모양이니, 강원도 금화의 촌부와 40년 인연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차 신부의 한인 사랑과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리라. 금화를 떠난 1964년 부터 1969년 까지는 서울의 콜롬반회 본부에서 사무직으로 봉사하고, 1969년 다시 강원도로 향한다. 2번째 임지는 횡성. 당시 횡성 본당에는 공소가 13군데. 도로 사정이 나빠 발이 부르트도록 산길을 걸어야 했다. 차 미도라는 한국 명은 이때 그에게 봉헌된 이름이다. 리차드에서 한국 성 “차”를 가져왔고, 공소들로 가는 좁고 먼 길이지만 이 길을 아름답게 한다해서 아름다울 “美”, 길 “道”를 얻었다. 아스팔트가 안깔린 좁고 울퉁불퉁 꾸불꾸불한 자갈길이었지만 차신부가 다녀 아름다운 길이었다. 미국에서 한인들과의 첫 인연은 1972년 횡성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4년간 콜롬반회의 신부 충원 담당 책임을 맡아 봉사한 후, 머서 아일랜드 소재 세인트 모니카성당에서 보좌 신부로 있던 1976년 4월. 씨애틀 교우들이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차신부를 찾아 한인 미사를 부탁함으로 써 만남이 이뤄졌다. 세인트 모니카 성당에서 5개월 간 보좌 신부로서 씨애틀 교구의 실정을 익힌 후 차신부는 세인트 에드워드 주임 신부로 발령 받는다. 이때 씨애틀 한인 공동체도 차 신부를 따라 미사 장소를 세인트 에드워드로 옮긴다. 이때부터 차 신부와 타코마 공동체와의 인연도 시작돼, 차 신부는 세인트 에드워드 성당 미사, 2개의 한인 공동체 미사를 집전하고, 메리지 인카운터를 비롯한 각종 모임을 지도하는 등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낸다. 세인트 에드워드 주임 신부겸, 두개의 한인 콤뮤니티를 사목하는 등 당시 너무 바쁘고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인 미사는 내게 활력소였다.”며 미소를 띠었다. 그만큼 한인들과 같이 하는 것이 편안했다는 뜻이리라. 그는 1983년 1월 콜롬반회를 떠나 씨애틀 교구 신부로 소속된다. 7월에는 디모인 소재 세인트 필로메나 성당 주임으로 발령 받으면서 한인 공동체를 떠난다. 소수 민족 가톨릭 공동체의 존립이유와 장래, 청소년 사목, 씨애틀 교구와 한인 신부와의 관계 등 2시간이 넘은 그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는 필자는 차신부가 하는 말 마디 마디에서 풍겨난 사랑이 온 방에 가득 찬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차 신부는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를 그윽히 풍기는 그런 성직자였다. 그의 인생을 그림에 비유할 때, 바탕색을 결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랑이리라.
인터뷰, 글: 이택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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