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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구일모, 유호식 신부님 (1991.8 - 2000.2)2021-12-3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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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모, 유호식 신부 시기

안으로 내실, 전교와 신심에 힘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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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일모 베드로 신부                                                          유호식 아오스딩 신부
     1991.8 - 1996.2                                                               1996.2 - 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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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미 데레사 수녀          박미숙 에메릿다 수녀                  임 헬가 수녀

      1993.3 - 1995.5                 1999.3 - 1997.3                   1995.5 - 19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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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보 까리따스 수녀             함은순 마리아 수녀
  1997.3 - 1999.3                      1997.3 - 1999.3


숙성이 창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1991년 8월 부터 2000년 2월 까지 근 10년간의 사목 기간은, 초창기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 공동체가 한 숨 돌리며 자세를 가다듬어 뒤 돌아 보고 재정비하는 수성의 시기였다.  초창기와 같은 뚜렷한 변화와 이슈는 없었을 지라도, 안으로 내실을 다지고 밖으로는 전교에 힘써 수많은 영세자를 내고 교세가 확장되는 시기였다.

1991년 8월 부임해 1996년 2월 이임한 구 일모 베드로 신부의 사목 기간 동안의 영세식 때에는 매번 수십 명씩 영세를 받는 등 신자 수가 증가했다.

구 일모 신부 재임 기간 중 시작된 대규모 바자회는 유 호식 신부 사목 기간까지 이어 지면서, 이틀 동안 계속되는 1회 시장에서 약 2만 불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의 성전 건축 기금이 조성되곤 했다.  바자는 성전 건축 기금 마련 뿐 아니라 교우 모두의 잔치 한 마당으로서 서로간의 친교와 여흥의 역할 또한 컸다.

1994년 3월에는 한동안 문을 닫았던 한국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으며, 청 소년들을 위한 영어 미사가 시작됐다.

구 일모 신부의 면면은 그가 떠날 때, 한 교우가 쓴 송별사에 잘 드러나 있다.  송별사에서 구신부의 일면들을 묘사하는 부분들을 발췌한다.

…..(전략) 신부님, 교리 반에서 만난 예비자 한 사람이 주일 미사에 불참한 것을 알아낼 정도로 당신은 세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해 안부 물으며 꼭 나오라고 당부하시던 따뜻한 우리들의 신부님이셨습니다.  아이들이 인사할 때면 손에 종이돈을 꼬옥 쥐어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신부님의 모습, 어쩔 수 없는 시골 촌 아저씨의 훈훈한 정에 따스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신부님, 우스개 소리에 박장 대소하며 앉은 채 벌렁 뒤로 자빠지는 당신을 볼 때면 투박하기는 하지만 순박하고 티없는 어린아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한 옥외 바자 때, 전날 밤에 내린 비가 아침에도 계속될 듯하다가 햇빛이 나자 주님의 은총이라며 즐거워하시던 모습, 성령 세미나 때는 음악에 맞춰 손뼉치며 덩실덩실 춤추시던 아이 같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가끔은 신자들에게 짜증도 내고 야단도 치던 신부님, 세련되거나 정제되지는 않았을지언정 가식 없이 솔직한 우리들의 신부님이었습니다.

신부님, 2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학부모들께 아이들의 주일 학교 등교 준비를 철저히 시키라고 훈계하시던 당신이 계신 동안 한국 학교가 문을 열어 제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청소년들을 위한 영어 미사가 시도되기도 했습니다.

신부님, 2년 전 사순절 당시 시카고에서 단식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쩌면 그렇게 미련할까 하는 생각 뒤에는 참으로 곧이 곧대로 밖에 할 수 없는 외곬수 신앙이 가슴에 와 닿으며, 당신 마음 속 피를 토하는  고집의 아픔이 소롯이 주님께 바쳐짐을 느꼈습니다. 그 경건함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후략)…..

구신부, 유 신부에 대한 신자들의 느낌은, 가식과 겉치레가 전혀 없이 항상 속 마음을 그대로 보이며 스스럼 없이 신자들과 마주하는 큰 형 같은 분들이라는 푸근한 것이었다.  언제라도 저녁 식사에 수저 한 벌만 더 놓으면 모실 수 있는 다정한 이웃과 같은 분들이었다.

구일모 신부 재임 시에는 혼인 갱신, 경노 잔치 등의 인정 넘치는 행사들이 많이 치러졌다.

1993년 9월에는 처음으로 합동 혼인 갱신 미사를 드리게 돼, 50여 쌍의 부부가 다시 한번 혼인식을 올려 새로운 감회를 맛본다.  그 중에는 감격으로 울먹이는 부인들도 많이 눈에 띠였다.

1994년 2월에는 본당 노인들이 기뻐하며 참석한 경노 잔치를 벌여, 음악 밴드, 가수 등을 동원한 즐거운 무대를 꾸몄다.

구일모 신부 재임 시 두 분의 수녀님들이 오게 된다.  1993년 3월 최 명미 마리 데레사 수녀와 박 미숙 에메릿다 수녀가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성당으로 부임하니 한국인 신부를 찾아 씨애틀로 미사를 드리러 가던 1970년대 말에 비해 실로 격세지감이다.  두 분의 수녀님들을 모시게 되니 그간 평신도들이 전적으로 맡아 해왔던 미사 준비, 주일 학교 과정 등의 일들이 수녀님들의 책임하게 진행돼 더욱 원활하고 효과적인 사목이 이뤄지게 된다.

1994년 3월에는 안나 요아킴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연령회가 창설돼, 돌아가신 분과 가족들에 대한 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봉사에 감격해 천주교에 입문하는 가족들이 많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94년 4월에는 그간 문을 닫았던 한국 학교가 개교해 약 100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맞아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치게 된다.

1995년 말에는 꾸르실료 교육을 통해 많은 꾸르실리스타들이 배출돼 본당에 대한 봉사를 더욱 헌신적으로 하는 교우들이 늘어 나게 된다. 이달에 최 명미 수녀가 본국으로 돌아 가고 임 헬가 수녀가 새로 부임한다.

1995년 9월 말에는 성전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대규모 바자가 처음 열려 구역별로 정성껏 마련한 음식과 물품들을 판매해 막대한 금액의 기금이 조성되는 동시에 이틀에 걸쳐 교우들의 친교의 잔치 마당이 펼쳐진다.  제 2회 한국 시장은 유 호식 신부 재임 1996년 9월에 다시 열려 1회와 다름 없는 성공을 거둔다.

1996년 2월 멕시코 성지 순례를 마치고 이임한 구신부에 이어 유호식 아오스딩 신부가 부임한다.  학문적 열정이 강해 보였던 유 신부 사목 기간에는 교육 피정이 많이 이뤄졌다.  주일 학교 피정, 전 신자 피정, 여성 피정, 특별 피정등이 자주 열려 교우들의 신심의 기반이 두터워진 시기였다. 1998년 12월에 은경 축일을 맞았으며, 정경보 까리따스, 함 은순 마리아 수녀가 박 미숙, 임 헬가 수녀 후임으로 부임해 떠났으며 1999년 3월 강옥인 막달레나, 최순금 루시아 수녀가 부임했다. 


자료, 글: 이택 어거스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