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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차 미도 신부 헌신으로 본당 뿌리 내려2021-12-3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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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미도 신부 헌신으로 본당 뿌리 내려

79년 7월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성당 첫 미사 – 공동체 면모 갖춰


1979년 7월 셋째 주, 드디어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성당 공동체만의 한인 미사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씨애틀의 차미도 (미국 Richard Parle) 신부가 본당 한인 미사를 위해 주일 오후 세인트 피터 폴 성당으로 내려 오게 된 것이다.

차 미도신부는 콜롬반 외방 선교회  신부로서 당시 세인트 에드워드 성당 주임 신부였다 (76년 9월부터 81년 6월 까지).  당시의 세인트 에드워드 성당은 약 2천 가구가 미사를 드리고, 보좌 신부가 2명,  부속 학교가 있는 대규모 성당이었다.  이 같이 큰 미국 성당 사목뿐 아니라 그는 이혼 부부 단체와 메리지 인카운터도 담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씨애틀과 타코마 2개의 한인 공동체를 사목했던 차신부는 그야말로 1인 5역을 하며 바쁜 날들을 보낸다.

오전에는 미국 미사와 씨애틀 한인 미사를 집전하고 오후에는 성 정하상 바오로 본당쪽으로 내려와 또 한인 미사를 집전하니 그의 사목에 대한 열정과 한인들에 대한 사랑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공동체 교우 숫자는 40-50명.

당시 콜롬반회의 신부 임기는 5년, 세인트 에드워드 성당에서 5년 사목을 끝낸 차신부는 한인 공동체 전담 신부가 될 것을 자청해 1981년 6월 한인 공동체 신부로 발령 받는다. 그 후 차신부는 훼더럴웨이 소재 세인트 테레사 성당 사제관에 기거하며 한인 공동체만을 위한 사목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도 1개월에 한 번씩 차신부를 맞아 한국말 미사를 볼 수 있게 된다.

1982년 부활절에는 18명의 한인들이 영세를 받게 되는 등, 차신부의 한인 전담은 곧 한인 공동체 확대로 이어지고 1983년 그가 이임할 당시 교우 가구 수는 거의 100 가구에  이르게 된다.

태동기 이후 4년간 차 신부의 사목 기간은 타코마 공동체가 뿌리를 내리며 공동체로서의 면모를 갖춘 시기였다.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공동체 미사를 별도로 보게 되긴 했지만 조직상으로는 여전히 시애틀과 한몸.  1981년 9월 주보를 보면, 씨애틀-타코마 본당 사목회의에 타코마에서는 김 규동, 황 의경씨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1979년 7월 부터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본당의 초대 사목회장으로 김규동씨가 봉사했으며, 1980년 황 의경씨가 2대 사목회장으로 봉사했다.  김광윤 바오로씨는 초대 총무로 선임돼 2대까지 수년간 성당 살림을 맡아 계속 봉사하게 된다.

 차미도 신부가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공동체를 전담한 직후 주보가  발행되기 시작한다. 1981년 8월 9일자 제 1호 주보를 보면, 전례에 최장식 토마스, 1독서에 김규동 바드리시오, 2독서에 이경석 베드로, 안내에 김광윤 바오로씨 부부로 나와있다.  미사는 10시 15분, 지난 주일 헌금은 $71.73로 집계, 헌금 단위가 페니 까지 내려 가고 있다.

초창기 몇 주간의 주보를 살펴 보면, 예비자 교리 반이 최장식 토마스씨를 강사로 시작됐고, 성가대원을 열심히 모집했던 모습이 보인다.

당시 주보는 모두 손으로 쓰거나, 다른 책에서 한 줄씩 오려 붙인 것.  모눈 종이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간 주보를 보면 오늘날의 우리 공동체 발전이 초창기 교우들의 땀과 정성에 힘입은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총무일을 맡아 한 김 광윤씨의 노고가 짐작된다.  첫 주소록 또한 1981년  9월에 발간됐다.  1982년 초 발간된 교우 명단에는 모두 72명의 교우가 등재돼 있다.  이 명단 또한 손으로 꼼꼼히 쓴 것이다.  지금은 누렇게 변색돼 마치 고문서와 같다.

1981년 10월 11일 최초로 우리 말로 쓴 성당 안내판을 세인트 피터 폴 성당 앞에 세운다. 당시 교우들의 감격 어린 마음들이 간판을 세운 후 찍은 기념 사진에 잘 드러나 있다.

1981년 11월 초 차신부는 타코마 지역을 4개 구역으로 나누고 구역장을 임명한다.  최초의 구역회의가 제 1구역 (켄트, 훼더럴웨이) 에서 열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진행되는 등 발전하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을 보인다.

1982년 7월 훼더럴웨이 소재 파이브 마일 공원에서 첫 야외 미사가 거행된 후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야외 미사가 매년 여름  계속되고 있다.

 차 신부는 1983년 7월 콜롬반 회에서 씨애틀 교구 소속 신부로 이적하며 한인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            떠나기 전 그는 한인 사제를 모시기 위해 노력한다.  씨애틀 교우인 조병기 바오로 신부의 동생을 통해, 뉴저지에서 사목 중인 조신부가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한 차신부가 당시 헌트 하우센 대 주교에게 한인 신부의 필요성을 역설해 조신부가 씨애틀 및 타코마 지역의 한인 공동체로 오게 된 것이다.  차 신부는 디모인에 소재한 필로메나 성당으로 떠난다

차신부는 한국에서 15년간 사목한 바 있어 한인들과는 친숙한 사이였다. 그에 대한 교우들의 인식은 “신자들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바람직한 신부상”으로 집약된다.  행정적인 일은 신자들에게 맡기고 영적 지도자로서 큰 기둥같이 서 계신 분이었다. 미사가 끝나면 싱긋이 웃는 그의 미소를 많은 신자들이 기억한다.  매 년 말이면 자신의 은행 구좌에 남은 돈을 모두 형편이 어려운 신자들 생필품 구입을 위해 다 쓰고, 0으로 만들어 버린 후, 새해에 새로 시작했다는 에피소드가 교우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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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글: 이택 어거스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