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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말 고해성사 염원, 공동체 형성(76.09~83.07)2021-12-3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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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고해성사 염원, 공동체 형성 

76년 9월 첫 만남, 씨애틀에서 한인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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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미도 신부 (Fr Richard Parle)
1976.9 – 1983.7

김규동 바드리시오, 황의경 마태오, 박 만규씨등 3가족이 만나 같은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1976년 9월이 성 정하상 바오로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효시. 같은 달에 들어있는 주보 성인 정 하상의 축일인 20일이 본당 창립일로 정해졌으니 (1991년 3월 조 장윤 베르나르도 신부 결정), 본당의 역사는 이제 4반세기에 이른다.

물론, 1976년 9월 이전에도 이들 3가족은 각각 다른 성당에 나가고 있었고, 이들 외에 김 광윤 바오로씨도 미국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김규동씨는 1975년 5월 부터 세인트 피터 폴 성당에 다니면서 그 해 말에 씨애틀 교우들과 왕래하기시작했다.  황의경씨는 1976년 2월부터 포트 루이스 영내 성당에, 김 광윤 바오로씨 3형제는  레이크우드 소재 돈 보스꼬 성당에 1976년   6월부터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규동, 황의경, 박만규씨가 1976년 9월부터 세인트 피터 폴 성당으로 같이 나가게 되고, 김광윤씨가 김규동씨의 권유로 세인트 피터 폴 성당에 합류하게 된다.

황의경씨는 자신이 교편을 잡고 있던 링컨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규동씨의 아들을 통해 김규동씨와 알게 됐으며, 김광윤씨 또한 수소문해 찾아 온 김규동씨로 인해 세인트 피터 폴 성당에 모두 같이 나가게 되니 한인 공동체의 산파역은 김규동씨가 한 셈이다.  박만규씨 역시 김규동씨의 지인이었다.

한인 공동체가 태동한 1976년 9월 3가족이 모여 나간 타코마의 포틀랜드 애비뉴 소재 세인트 피터 폴 성당의 당시 주임 신부는 폴란드계 리차드 씨불라 신부.  물론 영어 미사였다. 미사 전례는 기본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강론과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고해 성사 때는 언어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김규동씨는 손가락을 편 갯수로 십계명의 계명을  표시해 미국 신부에게 죄를 고했다고 한다.

이때 씨애틀에서는 이미 차 미도 (미국명 Richard Parle) 신부를 모시고 한 달에 한 번씩 한국말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1976년 4월 부터).  성 정하상 바오로 본당 교우들이 한인 미사와 고해 성사를 위해 씨애틀 세인트 에드워드 성당을 처음 찾은 것은 1977년 1월 초.  타코마 교우들만을 위한 미사는 아니었지만 한국 말 미사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1976년 9월 부터 약 2년간 한인 교우 숫자는 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한인 사제가 없었던 것이 한인 교우들이 많이 모이지 못한 가장 큰 이유. 그러던 중 1978년 6월 로마에서 귀국하던 최 영수 사도 요한 신부가 6개월 간 세인트 앤 성당에서 머무는 동안, 한국 신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인 교우들이 모여 들어 교우가 약 20여명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1977년 4월에는 워싱턴주 최초의 한인 영세자가 탄생한다.  박 만규씨가 김규동씨를 대부로 영세를 받은 것이다. 그 후 박 만규 프란체스코씨의 견진 대부로는 황 의경씨가 되니, 타코마에서 천주교우로 처음 만난 3사람은 그야말로 한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차 미도 신부가 타코마에도 내려와 한인들만을 위한 미사를 드리기 시작한  때는1979년 7월 3째주.  그때까지 타코마 교우들은 세인트 피터 폴 성당에서 영어 미사를 드리며 1개월에 한 번씩 씨애틀 세인트 에드워드 성당으로 한국어 미사와 고해 성사를 위해 올라간다. 당시는 미사 후 전 교우가 중국집으로 가 점심을 먹고, 저녁은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두 모여 같이 먹던 그야말로 소 공동체였다.  이때 3년 간은 미국 성당에서의 언어 불편 때문에 한국어 미사를 염원하며 노력하던 시기였다.
 
자료, 글: 이택 어거스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