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손님에게서 선물받은 브로드웨이의 '줄리아'라는 식당의 선물권이 어디선가 굴러다니는 것을 찾았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집안에 마루를 깔고 치우고 하면서 한쪽에다 치워놓고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번제 휴일로 인해 금, 토, 일 내리 사흘을 쉬는 롱 위크엔드를 맞아서, 저는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떨어뜨려 놓았고, 집에서 아내와 함께 커피 한 잔을 나눠 마시고, 그 선물권이 있음을 상기했습니다.

"아이들 데리고 가야지..." 아내의 말은 기대에 젖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는 제가 좀 낫지 싶습니다.

"아니, 우리끼리만 가야 해."

아내는 마치 하게 되면 들키게 될 그런 도둑질을 하는 초보 도둑같은 표정으로 "우리만 가도 돼?"라고 물어봅니다. "그럼, 가야 한다니까." 제 표정은 당당합니다. 하긴, 여기엔 지난번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겨 주었던 제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도 조금은 포함됩니다. 아내는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기 때문에, 잠깐 까먹고 있으면 확 생일이 지나 버립니다. 문제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생일 한 달 전부터 카운트다운을 해 가며 이날이 맞나 안 맞나를 따져가며 챙겨주던 아내의 생일맞이가 부실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편안하다는 것도 되겠고, 사실 그만큼 '식었다는', 즉 그 '활활 타던' 불이 꺼지고 불이 살아 있는 숯덩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내는 '괜찮다'고 말은 했으나, 올해 생일을 챙겨주지 않았다가 처형이 말을 해 주는 바람에 자기 생일이 그날인 줄 알았을 때 조금은 섭해하는 듯 했습니다.

이래저래 시간이 맞았고, 우리는 오랫만의 둘만의 외출을 즐겼습니다. 비록 제가 일하는 곳 근처이지만, 아내와 둘만 있는 시간은 유난히 틀리게 느껴졌습니다. 신록의 나뭇잎이 새로 나오고 있었고, 벚꽃은 어느새 화사하게 피어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벚꽃의 덕목 중 하나라면, 그저 아무것도 없는 마른 나뭇가지에서 갑자기 화사하게 피어난다는 것일 터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날 아내는 환히 웃었습니다. 우린 진짜 모처럼 둘이서 점심을 거하게 먹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제 라우트의 한 고풍스런 아파트 앞에서 사진도 찍어보고, 연인이었을 때처럼 내내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아내의 웃음은 확실히 틀렸습니다. 처녀 때의 그 웃음이 다시 나오는 듯 했습니다. 심지어 아내는 머리 벗겨진 제게 "총각때의 자신감 비치는 얼굴이 다시 나온다" 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부부가 때로는 '연인'이 될 수 있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삼스럽게 다시 손도 잡아보고, 마주앉아 눈도 바라보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부부의 생활에 다시 윤택한 윤활유가 되어 줍니다.

때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결혼생활은 모닥불 같은 거라고. 처음에 눈이 맞아 활활 불타오르는 모닥불처럼, 그렇게 사랑을 불태우던 부부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불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마침내 그 사랑은 재만 남아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부터가 바로 '사랑의 확인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모닥불이 꺼지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작은 나무조각들을 다시 주워 불을 붙이면 다시 활활 탈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활활 타는 불보다는 숯이 되어 은근히 불을 내고 있는 그 모닥불의 잔해에서 어쩌면 더 뜨거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아마, 아내를 위해 조그만 시간을 내어 보는 것은 우리의 '숯'에 그런 작은 관솔나무들을 줏어 다시 불을 붙이는 것과 비슷한 행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간의 구속 따위를 뛰어넘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의 아내를 다시 연인으로서 안았습니다.

시애틀에서...

권종상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