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우체부에게는 30분의 점심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 시간은 어차피 돈으로 쳐주지 않는 시간. 안 쓰면 손해가 되는 시간입니다. 과거에는 주어진 시간이 모자라 허겁지겁 뛰면서 일하기도 바빴는데, 이제 5년차 우체부가 되니 이런 시간도 나름으로 쓸 수 있게 되는군요.

점심을 가지고 제 라우트 근처의 인터넷 카페에 앉습니다. 아내가 정성스럽게 싸 준 도시락을 열고 차 한 잔을 시켜 따뜻하게 마시면서 창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어느새 벚꽃이 완전히 환하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벚꽃이란 녀석은 참으로 봄을 상징할 만 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게 됩니다. 앙상한 겨울 가지 그대로에 갑자기 피어나는 꽃으로 자기를 샘내는 날씨에 분홍색으로 대드는 예쁜 꽃이 기분을 새롭게 합니다.



제가 잘 가는 사이트들 몇 군데 들르면서, 천천히 점심도 먹고 나면, 그 다음엔 솔직히 조금은 나른해집니다. 이 순간 자리를 벌떡 차고 일어섭니다. 이곳은 커피나 차를 마시면 30분동안 무료로 컴퓨터를 쓸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어차피 저에겐 운전할 때를 빼고 나면 어디에 앉아 있을 시간조차 나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처럼 모든 가정에 들어가야 하는 '커버리지' 우편물들이 있을 경우, 우체부의 손길은 더 바빠집니다.



이곳 시애틀에 처음 이민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전나무의 행렬이었습니다. 그 쭉쭉 뻗은 나무들, 그리고 지금처럼 화사하게 피어 있는 벚꽃들의 인상이 참 강렬하게 마음에 와 닿았었습니다. 그것은 감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항상 보는 그것들은 감동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가끔, 내가 미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이 나무들이 또 다시 보이곤 합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비가 옵니다. 시애틀의 상징같은 비가 포도를 촉촉히 적시고 있습니다. 대충 샤워하고 나오니 반가운 지인이 집 근처에 찾아왔다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나가서 그를 만납니다. 바닷가에 사는 그가 갓 잡은 게를 잔뜩 가지고 와선 제게 나눠주었습니다. 참 고마운 벗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지만, 저는 그이를 스스럼없이 벗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역시 저를 벗이라 불러 줍니다.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나이 한 두살 차이에도 꽤 많은 제약이 따랐을 터인데, 제겐 저보다 나이 훨씬 많은 벗들도 있고, 저보다 훨씬 어린 벗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게 가장 친근하고 고마운 벗입니다. 영어에서 가까운 친구를 의미하는 '버디'란 말이 혹시 우리말 '벗'의 파생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한번 해 보면서... 벗과 아쉬운 작별. 그리고 저는 그가 준 게를 집으로 들고 옵니다. 아내는 아닌 밤중에 왠 던저니스 게가 살아서 꼬물거리며 나타나자 행복감에 활짝 편 얼굴이 됩니다. 그 녀석들을 대략 씻어서는 그냥 큰 찜통에 넣습니다. 아이고... 얘들이 살겠다고 버둥대는 것이 조금 불쌍합니다. 아이들이 "아빠, 이 게 우리가 길러도 돼요?" 하고 물어옵니다. 음... 그 게로 너희들을 기르련다...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도 이 불쌍한(하지만 맛있는!) 게들을 위해 짧은 화살기도 날려주고 바로 찜통을 스토브탑 위로 올려놓습니다. 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내음이 퍼지는 듯 합니다.



코스트코에서 자기네 이름인 '커클랜드'를 내걸고 새로 발매한 소노마 카운티산 샤도네를 땁니다. 느낌은 거의 켄달 잭슨의 빈트너스 리저브와 거의 클론이다 싶을 정도로 비슷합니다. 감미가 약간 덜 한 대신에 무게가 확실합니다. 사과, 열대과일의 향기, 그리고 깨끗함. 아마 와인의 생산지가 같은 탓이겠지요. 그래도 오크통 숙성을 덜 시켰는지, 캘리포니아 와인의 진한 버터 맛 속에서도 포도의 깊이가 함께 느껴지는 꽤 괜찮은 샤도네라는 생각이 듭니다. 찜통에서 꺼낸 던저니스 게를 잡아다가 분해를 합니다. 그리고 보니, 던저니스 게 역시 이 워싱턴주의 명물 중의 하나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다리도 튼실하고, 몸 살도 달콤하고 맛있습니다. 싱싱한 놈인 탓인지, 게딱지에 넣고 밥을 비벼도 맛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게살과 샤도네를 함께 나누며, 아내와 저는 내내 웃습니다.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행복합니다.



게 몇 마리와, 셀 수도 없는 웃음과, 그리고 샤도네 한 병이 오늘 밤을 꽉 채웁니다. 그리고 저는 내일 다시 브로드웨이의 거리를 걷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메일과, 미소와, 제 발자국들이 또 제 다정한 라우트를 채우겠지요. 그리고 메일맨은 봄 향기 가득한 거리에서 피어나는 목련꽃과 벚꽃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요. 베르테르의 편지를 목련꽃 아래서 읽을 경황은 없더라도, 베르테르의 편지를 로테에게 전해주는 일만큼은 분명히 해 줄 것입니다. 아울러 각종 공과금 고지서도. 하하.



시애틀에서...
권종상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