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코스트코에서 접선을 했습니다. 사진 찾아야 할 것도 있었고, 또 이것저것 장 볼것들도 있어서 들렀다가 고기 가격에 눈을 빼앗겼습니다. 뉴욕 스테이크가 파운드당 $5.99 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깎여져 있었고, 필레 미뇽 역시 파운드당 $8.99 로 내려 있었습니다. 평소 가격이 파운드에 $11.99 정도인 필레 미뇽이 이정도로 세일을 친다면, 어찌 한입 안 먹으랴 싶어서 네 덩이가 들어 있는 녀석을 30달러 정도에 구입했습니다. 아마, 요즘 고기들을 별로 안 찾는 모양입니다.

하긴, 주룩주룩 내리는 비 때문에 바비큐 불에 고기 구워 먹기엔 최악의 날씨이긴 합니다. 평소에 오븐에 쇠고기 굽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범죄' 수준으로 생각하지만 별 수가 없었습니다. 비는 엄청나게 내리고, 전형적인 서북미 날씨라고 하기에도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육고기 먹고 싶어서 샀으니, 어떻게든 굽긴 구워야 하는데, 최선의 방법은 결국 오븐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뒷마당엔 도저히 불 피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상황에서 불 때는 것도 우습거니와, 이미 오후 네 시면 깜깜해지기 시작할 정도로 낮도 짧아지고... 오븐을 켜서 일단 브로일러 기능으로 돌려놓고, 예열을 시켜주었습니다.

소금을 거의 발라주다시피 먹여주고, 후추도 듬뿍 뿌려두었습니다. 바비큐 그릴에 구울 때처럼 시어링(겉을 겉불과 센 불로 약간 태워 익혀주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양념이 충분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단 살짝 구운 후, 그 위에 우스터 소스를 조금 끼얹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20분정도 익혀준 후에 다시 돌려서 15분 정도를 익혀 주었습니다. 아내나 저나 요즘 이상하게 고기가 당기는 경험을 했는데, 아마 그것은 그동안 몸 생각한다고 평소보다 고기를 덜 먹은데다가 솔직히 계속해 바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제대로 와인 한 잔 못했다는 것 때문이었을 터입니다. 아이들 한글학교 간 동안에 지호 것까지 잘 구워 내었습니다.

고기를 잘 구워내고, 여기에 맞출 와인을 고르는데, 얼마전에 비노 베리테에 갔다가 집어든 와인이 생각났습니다. 아주 레이블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와인입니다. People's Party Red. 참 재밌는 레이블입니다. 구소련 붉은 군대의 선전 포스터를 살짝 바꾸어 총 대신에 와인병을 든 병사들, 그리고 폭격기에서 폭탄 대신 떨어지는 와인병... 그리고 이 와인을 만든 와이너리 이름조차 장난이 아닙니다. Delicious Beverage Liberation Front,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금준미주 해방전선' 정도가 되겠습니다. 오리건에서 나오는 이 와인은 콜럼비아 밸리산의 포도로 만든 클라렛 스타일의 와인입니다. 맛도 유럽 쪽의 와인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신세계 특유의 달달함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거의 완벽한 드라이 와인으로 충분한 산도가 뒷받침되고 있어서 장기 보관도 가능할 듯 하지만, 미디엄 바디로 마시는데 특별히 걸리는 것은 없습니다.

이 와이너리는 노스웨스트 바인 프로젝트라고 불리우는 와이너리간의 공동출자 작품입니다. 오라일리 와이너리, 오웬 로 와이너리 등을 운영하고 있는 데이빗 오라일리와 앤드루 리치 와이너리가 합작해서 저렴하면서도 괜찮은 와인을 만들기로 작정을 하고 나섰던 것이지요. 모르긴 해도 둘 중의 하나는 분명히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을 겁니다. 아니면 둘 다 그렇거나. 하긴 이런 와인을 14달러가 채 안되는 가격에 팔고 있는 것도 이들이 왜 굳이 '해방전선'이라는 빨간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을 지었는지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아마 와인 업계에서도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형 디스트리뷰터와 이들과 합작하고 있는 와이너리들만이 자본을 독점하고 유통을 독점하는 상황을 비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때문에 부티크 와이너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만 와이너리 두 개가 이렇게 합작을 해 인상적인 와인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와인이라는 음료가 분명히 고급이라는 인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케팅'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음료임은 분명합니다. 아마 DBLF 는 이런 인식을 깨고자 하는 시도일 수도 있었겠지요. 이 레드와인의 이름조차도 의미심장합니다. '붉은 인민당'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평범한 사람들의 파티용 레드와인'으로 해석될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와인이 자기 가격보다는 훨씬 훌륭한 품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들의 철학, 그리고 소비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하는 그들의 목적은 제대로 달성한 셈이지요.

하긴 와인이라는 술에 입혀진 '환상'은 조금 벗겨줄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위에서 저렴하면서도 맛있고 친근한 와인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리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술이야, 술."  아마 이 와인을 만들어 낸 친구들도 그런 비전과 소신을 가지고 지금 이 와인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블, 아무리 봐도 인상적이군요. 하하.

시애틀에서...

권종상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