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부로 일하다 보면 별 일을 다 겪습니다.

등기우편을 배달하기 위해 어느 아파트 문을 두드렸는데, 끼익... 하더니 문이 열립니다. 로큰롤 음악 소리가 찢어지게 흘러나온다 싶은데, 문 열린 줄도 모르고 젊은 백인 남녀가 앉은 자세로 하나가 되어 엉켜 운우지락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헉... 재빨리 문을 닫으려 하는데, 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습니다.

저는 엉거주춤 등기우편을 들어보여 주고는 손으로 싸인을 받아야 한다는 시늉을 하고 재빨리 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 남자가 속옷만 걸친 채로 나와선 서명을 해 주었습니다.

풋... 웃음이 나왔습니다. 문이?잘 걸어 잠그고 하지.

우체국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제가 겪은 일을 이야기하니, 그 반응도 가지가지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동료 A:  "나랑 라우트 바꿔서 돌릴까?"

동료 B:  "그럴 때는, '메이 아이 헬프 유?' 라고 말해야 하는거야."

동료 C: "아예, 여자한테 '두 유 니드 섬 모어?'라고 하지 그랬어?"

으으... 이 도움 안 되는 인간들.

어쨌든, 실실 웃으며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를 합니다.

"집에 야채 뭐 있어요?" 

아직 일하고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 제 목소리는 당연히 경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내리 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주는 지난번 롱 위크엔드를 지나고 나서, 그 다음주엔 하루도 못 쉬고 일한 후 맞이하는 새로운 주입니다. 우체부들은 매주 돌아가면서 쉬는데, 만일 제가 월요일에 쉬었다면 그 다음주는 화요일이 쉬는 날이 되는 거고, 그 다음주는 수요일, 그 다음주는 목요일, 그리고 금요일에 쉬는 주는 토요일까지 내리 쉬게 됩니다. 그리고 맞는 다음주엔 하루도 못 쉬고 일을 하지요. 그리고 다시 월요일부터 그 사이클이 돌아가는 겁니다. 일요일은 당연히 쉬는 날이니, 이틀을 내리 쉰다는 즐거움은 당연히 제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쉬는 날이 있다고 해도, 그건 쉬는 날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토요일 오후엔 보통 잔디를 깎거나, 자동차를 세차한다거나, 혹은 뒷마당을 정리한다거나 하는, 그런 밀린 집안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통이며, 일요일엔 성당 일로 바쁘기 마련입니다. 특히 이번주는 구역회가 있는 까닭에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분주했고, 아버지 날이 낀 까닭에, 아버지 선물도 사러 뛰어다녀야 했고, 아이들 먹거리도 좀 만들어줘야 했습니다.

"양배추도 있구요, 브로컬리도 있거든요."

"응, 그거면 됐네요."

집에 가는 길에 모처럼 '트레이더 조' 마켓에 들릅니다. '비교적' 오랜만이라는 느낌. 먹고 싶었던 치즈들이 있었거든요. 미국에서 산 지 꽤 오래됐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치즈가 정말로 막 당기고 먹고 싶어서 트레이더 조에 들렀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마치 김치가 당기는 것처럼 말이죠.

흠... 매리네이티드 모짜렐라. 지호가 좋아하는 치즈입니다. 모짜렐라 치즈를 올리브기름과 식초, 그리고 갖은 양념에 담가둔 치즈라고 할까요.

흠... 마드리걸 치즈도 다 먹었었지. 고소한 맛으로 잘스버그와 비슷한 느낌의 마드리걸은 어린 스위스 치즈라고 할 수 있는데, 촉감은 꼭 생고무 비슷한 데가 있지만, 견과류 맛이 물씬 풍기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집에 가 보니 냉장고엔 먹다 남은 스틸튼 치즈와 콜비 잭 치즈가 있었습니다. 아예 이것들도 다 꺼내 놓습니다. 약간의 고린내가 진동을 하는군요. 블루치즈의 나쁜 점 하나가 이것이긴 해요. 냄새... 아무튼 여기에 크래커를 놓고 오늘 저녁을 즐길 준비를 합니다.

"그거, 오늘 저녁이예요?" 아내가 물어봅니다.

"응, 여기에 야채나 조금 삶아 주면 좋겠어요."

치즈에 삶은 야채. 저는 가끔 이런 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곤 합니다. 아무리 밥심으로 사는 거라곤 하지만, 일단 밥을 피함으로서 과다한 탄수화물 섭취를 피하고, 대신 섬유질의 섭취를 늘려줌으로서 정장 효과를 노린다고 할까요. 매일 이런 식으로 먹는다면 물론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런 음식들도 저녁 한 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제 입맛은 변해 있었습니다. 미국생활 20년이 가까워온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되는군요.

물론, 이런 식단이 갖는 또 하나의 장점은... 이 한 끼 식사가 훌륭한 와인 안주가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삶은 양배추와 브로컬리, 그리고 치즈의 어울림은 그것이 화이트든, 혹은 레드든 가리지 않고 잘 맞아 주는데, 오늘은 굳이 '로스 바스코스'를 한 병 뜯습니다.

오리건에 갔더니, 아내 친구 집 바로 옆에 있는 세이프웨이 Safeway 수퍼마켓에서 이걸 $8.69 씩에 세일을 하고 있더랍니다. 아무튼 이 와인 세 병이랑 다른 와인 세 병 해서 여섯병을 사냥해 올라왔습니다. 오리건주는 워싱턴주와 세법이 틀려서, 술에 붙는 주세도 저렴하고, 워싱턴주처럼 판매세도 붙지 않기 때문에 위의 가격이 그대로 그 가격입니다. 만일 워싱턴주 같았으면 $9.99 에 판매세 9% 해서 거의 11달러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했을 터입니다.

체리, 자두, 약간의 육질도 느껴지는 와인인데, 이 가격이면 무척 좋다고 할 수 있지요. 기꺼이 '오늘의 데일리'가 되어 줄 터입니다.

아내에게도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얼굴이 발개진 아내가 제게 말하는군요.

"어이구 인간아. 눈을 감고 얼른 그 자릴 빠져나와야지. 저거 좋아서 입 찢어지는것좀 봐."

아내의 입에 크래커에 올린 치즈를 넣어주던 저는 씨익 웃었습니다.

"얼른 애들이나 재워요."

아내의 발그레한 얼굴을 보면서, 와인은 더욱 향그롭게 넘어갔습니다.

시애틀에서...

권종상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