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것도 일을 안 가는 날 아침은 늘어지게 여유롭기만 하고, 분주함과는 영 거리가 멉니다. 물론 오늘은 바쁜 일들이 참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날 같으면 지금쯤 하이웨이 어딘가에서 운전하고 있거나 혹은 케이싱 작업을 앞두고 잠시 쉬는 시간일 터,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집에서 저 혼자 깨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아니면 오늘처럼 뜨거운 아삼 홍차를 우려선, 여기에 우유 대신 레몬을 듬뿍 치고 약간 달게 마시는 것도 꽤나 괜찮은 일입니다.

며칠간, 아니 거의 일주일 정도는 '정상적' 인 모습하고는 전혀 다르게 살았던 듯 합니다. 성당의 성령세미나 노래봉사를 맡아 졸지에 팔자에 없는 '카수'가 되어 나흘을 노래 빽빽 하면서 지냈고, 그 바람에 밤 늦게 들어와 블로깅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오늘은 주중에 쉬는 날인데, 저녁엔 ME 봉사자들이 저희집에 모여 함께 교육받는 날이어서 지금 그동안 널려놓았던 잔해들을 치우고 있습니다. 아내와 제가 둘 다 성령기도회 봉사자로 묶이는 바람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들을 대략 정리하다보니, 아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해도 해도 표가 안 나는 일인지가 새삼스럽습니다. 바깥 정원 일은 그래도 해 놓으면 표시라도 나는데, 집안 일은 전혀 표시가 나지 않으니 참...

아, 그동안에 새로 와인을 하나 괜찮은 걸 발견했습니다. 콜럼비아 크레스트에서 투바인 레이블로 '빈여드 10' 이란 이름의 레드와 화이트가 나왔습니다. 둘 다 마셔봤지만, 화이트는 깔끔하고 좋다는 정도의 느낌이 들고, 레드는 "이거, 물건이다!"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녀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섯 병을 사서 모두 한 병 남기고 끝내 버렸습니다. 또 사러 가야겠습니다.

가격은 대략 6달러가 조금 넘는 와인인데, 콜럼비아 크레스트는 아마 작정하고 오래된 포도밭들을 갈아치울 모양입니다. 이 와인은 시라, 카버네 프랑, 산지오베세라는 참 묘한 블렌딩을 하고 있습니다. 신세계 와인들의 장점은 이런 실험이 가능하다는 건데, 콜럼비아 크레스트의 이번 실험은 성공인 듯 합니다. 저도 지금 이 와인을 눈에 띄는 대로 사들이고 있고, 지금까지 나왔던 '데일리 와인 급'에서는 챔피언을 줘도 마땅할 듯 합니다. 블랙베리, 자두의 향이 뛰어나고 깊습니다. 여기에 맛은 부드러우면서도 깊이가 있고, 긴 피니시가 좋은 여운을 줍니다. 아마 대량생산 됐을 듯 한데, 그 인기 때문인지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군요. 하긴 이 가격에 이정도 품질이라면 당연히 박스로 사 쟁여놓아도 될 듯 합니다.

와인 생활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일일 일병, 매일장취를 삶의 목표와 낙으로 삼았던 제가 와인 한두 잔에 충분히 취하는 법을 알게 되면서 안주도 가벼워집니다. 지난 7월 중순, 아직도 그 움을 틔우고 있었던 고냉지 고사리들을 채취해서 말려 놓았는데, 나물 해 놓았더니 맛이 정말 일품입니다. 여기에 닭고기 너겟 몇 개 놓고, 또 속이 자주빛 나는 고구마 조금 놓고... 이렇게 해서 와인을 천천히 마시는데, 그 의미가 참 색다릅니다. 지나가는 하루들을 음미하고, 또 그 하루속에 담아 놓았던 의미들을 다시 꺼내어보며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혹은 내 삶에 주어진 의미들을 그저 흘려버리는 것인지를 반성해 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 그리고 매 순간마다 주어지는 '지금'이라는 선물' 을 받아 가꾸는 것일 터입니다.

손님들 오실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여기저기 눈에 걸리는 것들을 청소하고, 정리하고, 설겆이도 좀 해놓고 그래야 하는데, 아침엔 아내에게 짜증을 부리기도 했었습니다. 왜 성당 일에 이리 얽매여서 우리가 즐겨야 할 자유로운 시간들까지 빼앗겨야 하는가 하고 좀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아내의 출근 시간은 늦어 버렸고, 아내가 화 나서 출근하는 뒷모습을 보며 솔직히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 미안함을 내색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이따가 손님들 가고 나서, 적절한 와인 한 병 따놓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듯 합니다.

삶에서 이런 일들은 때로 제 마음을 불편하게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을 잘 치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을 성 싶습니다. 그리고 그 성숙된 우리 마음 안에서 더 기쁜 결혼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요. 결국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삶은 서로에 대한 이해이며 양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로 일구어낸 작은 사회가 제대로 설 수 있다면, 또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결국 사회도 바꾸어질 터입니다.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내 가족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가정'만 평안하기를 원하는 것의 합리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사회에서 우리는 사회구성원 각자가 바로 그 '평화로운 가정'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을 위해서 서로를 더 존중해야 한다는 작은 사실 하나를 깨우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빨리 집안 치워놓고 너저분한것들 정리해놓고, 마당 마저 정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일 마치고 집에 올 아내를 편안하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밤엔 이 편안하며 좋은 와인 한 병을 따서 아내와 나누어야겠습니다.

시애틀에서...

권종상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