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이 끝났습니다. 아이들에게 사순 기간이 끝나고 나면 스테이크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터라, 일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코스트코에 들렀습니다. 이미 아내도 며칠 전부터 '뉴욕 스테이크'를 외쳐 오던 참이었으니. 다섯 덩어리의 커다란 뉴욕 스테이크 가격은 30달러 정도. 등급은 초이스, 그리고 스테이크의 컷이 마음에 듭니다. 적어도 1인치가 넘는 두께의 컷으로 판매되기 때문에, 고기가 실하고 듬직합니다.

음... 고기를 구우니 버섯은 반드시. 그리고 아스파라거스, 그밖에 이런 것 저런 것들을 장보고 나서, 혹시 몰라서 차콜 큰 것을 두 봉지 사서 카트에 담았습니다. 사실 톱밥을 재료로 해 만든 목탄이지만, 그 생긴것만으로보면 딱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겨울에 학교 교실 한 가운데 놓여 있는 난로(추운 겨울이면 그 위에 도시락들 깨나 올려 놓았던)의 연료로 쓰던 조개탄이 딱 생각나는 이 차콜 브리켓은, 지금까지 제가 쌓아온 불 내공(?)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허니... 내가 왜 이러죠? 고기가 눈에 아른거려요."

아내는 이미 제게 이런 주문을 통해 그녀가 조금 '민감하고 특별한 때'를 맞았음을 제게 강조한 터입니다. 이런 때는 말 그대로 '알아서 해 드리는 것'이 우주의 평화와도 직결되는 가정의 평화를 지켜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만큼 결혼하고 나서의 짬그릇 수가 충분히 채워졌다는 것의 반증이라 하겠습니다.

"허니! 고기 사 왔어요. 내가 금방 해 줄께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콜 남은게 얼마나 되나 확인하고, 아직 새로 산 차콜을 뜯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남은 것을 그릴에 붓고 차콜라이터를 적절하게 뿌려준 후에 불을 붙이고, 바로 목욕 모드로 들어갑니다. 샤워 끝나고 나오니 천천히 불이 자리잡기 시작하는게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이른바 '불 내공'이 나와주어야 합니다. 불집게를 가지고 잘 타고 있는 녀석들을 사방으로 옮겨 줍니다(앗 뜨거!) 그 다음에 아직 붙지 않은 차콜들을 그 위로 옮깁니다. 말로 이렇게 하니 매우 쉽습니다만, 역시 장기간의 공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드디어 불이 백열의 순간을 맞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작업이 필요합니다. 고기는 불을 붙이고 샤워 들어가기 전, 소금과 후추, 그리고 우스터샤이어 소스와 파슬리, 베이즐 등으로 밑간을 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불 내공'은 이런 데서 나타는 것이지요. 얼마나 적절히 그녀가 먹고 싶은 수준으로 고기를 해 주느냐... 이겁니다. 불이 백열기를 살짝 지나 사그러들은 듯 하지만, 사실은 이 때가 고기며 야채를 굽기에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 아주 백열일 때는 그저 고기 태워먹기 딱이고, 이 때는 야채들을 구워주기에 좋습니다. 특히 옥수수라도 있다면, 이때의 불이 좋습니다. 여름이 빨리 와서 이 불을 피워 옥수수를 구워먹어야 할 텐데... 하는, 봄철에 하긴 좀 한심한 생각도 잡음으로 끼워넣어 본 후에 천천히 고기를 올립니다. 바로 기름이 숯 위로 떨어지며 확확 불을 냅니다. 일단 사이드부터 구워준 후 약간의 시어링(겉을 일부러 불로 태워주는 것)을 합니다. 그 이유는 숯불에 겉을 구워냄으로서 숯불의 풍미를 배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릴의 뚜껑을 닫고 유입공기의 양도 최대로 낮춥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슬로우 쿡킹' 모드로 갑니다. 일단 뚜껑을 닫으면 기름이 떨어져도 화염이 크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태우지 않고 고기를 익힐 수 있습니다. 흠... 대충 이 정도면 내가 먹을 건 되겠다 싶어서 일단 하나 꺼냅니다. 원래 시식이란 불잡이의 특권. 나머지 고기들은 그대로 그릴에 올려 놓고 썰어 먹은 순간... 음... 이 맛입니다. 아내는 틀림없이 제가 이 레어 미디엄 고기를 먹는 걸 보면 짐승이니 뭐니 할 테니, 바깥에서 구우면서 스테이크 4분의 1 장을 '맛뵈기'로 해먹고 맙니다. 하하.

원래 이런 '옥반가효'에는 당연 '금준미주'가 따라줘야 하는 것이 마땅할 터. 둘레둘레 뒤지다가 왈라왈라의 스타, '쿠거 크레스트'를 꺼냅니다. 이곳의 보르도스타일 블렌딩와인인 '데디케이션 2' 는, 1천 532 케이스가 만들어졌습니다. 와인스펙테이터에서는 점수를 좀 짜게 주었는데, 제 점수로는 그보단 조금 높은 와인입니다. 그만한 가격에($20), 이만한 맛을 내어주는 와인이라면 충분히 치하받아 마땅합니다. 원래 이 와이너리는 시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 보르도 블렌딩은 충분히 거기서 받은 기대치를 받아 마땅합니다. 굳이 느낌을 말하자면, '지분의 향기'입니다. 예전에, 시집가기 전의 처자가 날 받아놓고 방물장수 오면 사들이던 그 지분... 아련한 느낌이 옵니다. 장미 꽃잎, 그리고 붉은 과일류의 향이 가슴을 적시는 듯 합니다. 좋은 와인입니다.

고기가 다 익었습니다. 식탁으로 가지고 들어오니 당연 지호도 신나합니다. 에이 원 소스 조금 옆에 더하고, 남은 불에 간해 놓았던 고등어를 올려놓고, 아내와 지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어린 지원이는 아직 스테이크 고기 맛을 모르는터라, 갈비를 구워 주었습니다. 포도가 자란 그 땅의 느낌이 확 올라오는 와인을 대하는 아내가, 처음으로 마시는 이 와인에 대해 극찬을 합니다. 하긴, 이 정도 와인이면 그만한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 이 와인도, 지난번 제 메일 손님들이 제게 와인 선물권을 주었을 때, 그것으로 샀던 모양입니다.

캘리포니아 지역의 실력있는 와인메이커들이 그간 워싱턴주로 꽤 유입된 모양입니다. 하긴 버나드 그리핀의 랍 그리핀 역시 원래 캘리포니아 사람이고, 그쪽은 UC 데이비스를 비롯해 고급 와인 인력들을 양산해낼 수 있는 교육기관들이 많은데다가, 또 문제는 그간 나파밸리나 소노마 카운티 등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버리는 바람에 실력있는 와인메이커들이 자신들 소유의 에스테이트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워싱턴은 그들에게 매력있는, 혹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불모의 땅'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서 천혜의 혜택을 받고 자라는 포도들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여기에 글로벌 워밍, 즉 지구온난화 현상까지도 한몫을 해서, 지금 워싱턴주에서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라는 거의 모든 포도가 자라는 셈이 됐으니... 이런 저런 요소들이 지금 워싱턴주 와인의 새로운 진흥의 발판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비록 경기 악화로 인해 많은 와이너리들이 안타까운 폐쇄를 맞기도 했으나, 나파 밸리산 와인의 현실성 없는 가격에 지쳐버린 미국의 와인 소비자들이 저렴하면서도 훌륭한 품질을 보이고 있는 워싱턴 산 와인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 와인은 지금 그런 현상들 속에서 눈에 띄는 녀석들 중 하나지요.

아무튼, 아내는 고기를 잘 먹어 주었고, 의미있는 눈짓을 주었고...

다음엔 언제 고기 먹나.

권종상 요셉